물론, ‘실재’와 ‘비재’, 즉, 이 세상에 무엇이 있고 없는지 사유한다고 해서 누구나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흑암의 끝에 있는 빛만 아주 살짝 볼 수도 있고, 소크라테스처럼 흑암에 이르지도 못한 채 이런저런 이유로 죽을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집중해서 ‘실재’와 ‘비재’를 계속해서 사유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죠.
‘예수시다!’
처음 보면서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명확하게.
또, 노자처럼 성경을 전혀 몰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러면서 자신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고요.
그런데 사실, ‘실재’와 ‘비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에 대하여 사유하려면 칸트처럼 자신에게서 자꾸만 발견되는 모순, 즉, 자기모순을 계속해서 해결해야 하지만, 막상 이렇게 하는 것이 괴로울 만큼 매우 힘들기 때문인데요, 그에 앞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남의 모순과는 달리, 자기모순은 발견해도 인정하기조차 매우 어렵죠.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눅 6:41)
그렇다 보니 ‘실재’와 ‘비재’를 사유하다가 금방 포기할 수도 있고요.
이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실재’와 ‘비재’보다 쉽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TV,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 주식을 비롯한 이런저런 돈벌이 등등.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때로는 반드시 누구에게인가 집중하거나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하는데요, 현실이 이렇다 보니 ‘실재’와 ‘비재’를 사유하고 싶다는 생각은 도저히 못 할 수도 있죠.
심지어 ‘실재’와 ‘비재’에는 호기심조차 못 가질 수도 있고요.
더구나 ‘실재’와 ‘비재’를 사유한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거나 상관없이, ‘실재’와 ‘비재’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진화론자 등 유물론자들처럼 남의 모순만 지적하면서 모순된 말과 행동만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삶을 후회할 수밖에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