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70) 썸네일형 리스트형 드러나는 질서 아무런 규칙도 없는 듯 다스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원래 규칙이나 법칙 등의 질서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선악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인데요, 짐작은 물론, 상상도 도저히 할 수 없죠. 있었거나 없었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이 혼자 계셨을 때는 질서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아무튼,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신 뒤로 이런저런 온갖 질서가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질서, 그리고 피조물들 사이의 질서 등등.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간단하게 말하.. 최초의 사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성경에 적혀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구상에 맞게 사람을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온갖 생물을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으리라는 것인데요, 처음의 구상대로 자신을 닮게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이겠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더구나 온갖 생물은 하나님을 그대로 닮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생각하기 쉬웠을 테니까요. 그런데 성경에는 아담이 온갖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줬고, 그대로 모두 다 동물의 이름이 됐다고 .. 존재의 이유 사람은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갖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게 됐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생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에게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 되는데요, 또, 존재 의미가 되죠. 그리고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도 되고, 삶의 목적도 되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겠다고 구상하셨다는 것은 사람보다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먼저 존재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반면, 하나님의 구상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의 존재 이유나 목적은 존재할 수 없었는데요, 그렇다면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죠..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온갖 생물을 다스리게 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구상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맞게 자기 역할을 해야 하는데요, 그래야 존재 의미만큼의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죠. 하나님과 온갖 생물에게는 물론, 사람인 자신에게도. 그러면서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가질 수 있고요.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거나 상관없이, 막상 자신이 사람인지 모른다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구상대로 살 수 없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사람인지도 모를 만큼 자신에게 집중을 못 하면 자기 역할을 못 하기 쉬운데요, 또, 자신이 .. 세상의 시작 성경은 창세기, 즉, 하나님이 사람을 비롯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하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이런 까닭에, 창세기 1장은 ‘스스로 있는 자가 태초에 사람을 비롯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니라’라고 바꾸어 말 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또, 하나님은 자신이 처음이자 나중이며, 시작이자 끝이라고도 소개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쉽게 말하면, 역사 등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에게서 끝이 나며, 또, 모든 공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에게서 끝이 난다는 것.. 모순덩어리 자신에게 집중해야 자기모순, 즉, 자신에게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과 행동이 다르다거나,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한다거나 등등. 또, 무엇이 자기모순인지 알 수 있는데요, 자기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재’와 ‘비재’를 사유하게 되죠. 이런 까닭에, ‘실재’와 ‘비재’를 사유하려면 먼저 반드시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 반면, 자신에게 집중을 안 하면 자기모순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남에게 계속해서 지적받는데도 자신에게는 모순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이 때문에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면서 습관적으로 살기 쉽죠. 그러면서 역시 습관적으로 남의 모순만 열심히 지적할 수도 있고요. 그런.. 실재(實在)와 비재(非在) 물론, ‘실재’와 ‘비재’, 즉, 이 세상에 무엇이 있고 없는지 사유한다고 해서 누구나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흑암의 끝에 있는 빛만 아주 살짝 볼 수도 있고, 소크라테스처럼 흑암에 이르지도 못한 채 이런저런 이유로 죽을 수도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집중해서 ‘실재’와 ‘비재’를 계속해서 사유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죠. ‘예수시다!’ 처음 보면서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명확하게. 또, 노자처럼 성경을 전혀 몰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러면서 자신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고요. 그런데 사실, ‘실재’와 ‘비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에 대하여 사유하려면 칸트처럼 자신에.. 예수와의 만남 ‘실재’(實在)와 ‘비재’(非在), 즉, 이 세상에 무엇이 있고 없는지 계속해서 사유하다 보면 흔히 허무라고 말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흑암에 갇히게 됩니다. ‘겨우 이곳에 오려고 이제까지 내가 그렇게 고생했다니’ 흑암이 끝이라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하는데요, 그러다가 한참 뒤 흑암의 끝에 한 줄기의 빛을 등지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죠. 성경을 전혀 몰라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명확하게. 이를 계기로 자신이 처음이자 나중이며, 시작이자 끝이라는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한마디로, 예수님을 발견한 순간 하나님이 진짜 끝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을 이.. 이전 1 2 3 4 ··· 9 다음